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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와 처음으로 커피를 주문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플리즈” 오늘의 캐시 담당 서버는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아-메-리-카-노가 무엇인지를요. 영어로 말하기가 꺼려지는 이유는 대개 두가지일겁니다. 하나, 내 발음이 틀린 것일까봐, 둘, 내 억양이 틀린 것일까봐. 그런데 '아메리카노'에서조차 발음과 억양이 틀렸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치사하게 구는 세상이라니요.

학부 freshman으로 입학한 저는 첫학기에 시간표를 짜다, 인터네셔널 학생‘만’ 받아준다는 ‘Conversational English’라는 과목을 추천받게 되었고 이 과정이 발음과 억양에 큰 도움닫기가 되었습니다. 그 수업의 묘미는 세달간 Apple≠Elefant 라는 것, 그리고 Eagle≠Indian 라는 것을 반복 주지 당하는 것이었죠. 뭐가 어떻게 다른데? [애]플과 [애]-ㄹ레펀트에서 두 개의 [애]는 다르게 읽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글과 [이]-ㄴ디언의 [이]도 다르게 발음 되어야 하는겁니다. 다국적 학생들이 중얼되는 발음에 특화 된 세심한 귀를 가지고 있는 교수님이 아니었다면야 우리들은 이것들을 구분해내려는 시도 없이 살다 죽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사과랑 코끼리를 대충 발음한다고 걔네들이 못 알아 듣겠어? 여기서 ‘대충하기’로 타협하게 되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새로 생긴 산책길에서 일해보니까(working) 좋던데?”

Work(일하다, 효과가 있다)와 Walk(걷다)의 발음을 구분하지 않아두면 가끔씩 이렇게 망언을 하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Would였습니다. 믿기 힘들지만 “우주 라익 썸씽 투 드링크?”하면 상대방이 뭐 마시겠다고 대답해줄 수 있겠지만 “나는 ~하게 될거다”라고 말하고 싶을 때 “아이 우드..”라고 하면 상대방이 뭐라 했냐고 다시 물어봅니다. 했다고? 할꺼라고? 이런 식으로요.
  



이렇게 밖에 표현이 안 된다는 건 슬프지만 현장에서 자꾸 들어 본 것에 의하면 이렇던데요.



토크 아닙니다... 아니더라구요.

맞을거라 믿어왔던 발음들에게서 모두 등을 돌리고 의도적으로 발음 교정을 하면서, 다른 외국인들이 어디서 어떻게 올리는지를 주의해서 듣고 따라하다보면 완전한 ‘대화체’가 완성이 됩니다. 이번 학기 룸메이트인 미국인 L은 피곤한 하루를 보냈다면서도 어찌나 음을 왔다갔다 하면서 말하는지 정말 지친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일단 한 음을 고수해서 말을 이어가는 미국인들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얘네들이 “어썸”을 얘기할 때는 ‘어’에서 ‘썸’까지 음의 높이와 깊이가 마치 폭포 줄기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도 기숙사에서 미국인들과 먹고 자면서만 배울 수 있는게 이런 것이었습니다. 모든 대화를 할 때 쇼를 하라 쇼.

지금까지의 교정 과정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따분하고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은 순간들이 있긴 하지만요. 그걸 넘어선다는 것은 앞서 말한 말하기를 꺼리게 되는 염려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고, 자 이제는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두가지가 귀찮아집니다.
“How are you?"
"How was your day?"

를 꼭 매일같이 내게 물어야만 하는거니? 그리고 나는 다 대답해야 하는거니? 라는 귀찮음입니다. 솔직히 이건 귀찮다고 밖에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야 너 그거 봤어?”로 시작되는 식의 대화를 좋아하기 때문이죠. 그게 아니면 “우리 얘기좀 할까?”라든가요. 가끔 이들은 질문을 변형하여 "How is it going?"이라며, 저번에 만났을 때 얘기했던 그 특정 일이 잘 되가고 있냐 하고 물을 때도 있지만, 이 질문도 크게 봐서는 “요즘 니 인생이 잘 굴러가는 거 같아? 어때?”라는 하와유에 준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들이 귀찮은 이유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답변을 해줘야 하는지 잘 감이 안 잡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인들이 이 질문을 건내는 횟수가 생각보다 잦기 때문이기도 하며 오늘 처음 본 그 누구든 내게 이 질문을 가지고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It was good", "I'm fine"이라고 대답하고 말아버릴 수도 있지만, 그들의 경우에는 이렇게 대답을 하고도 자신의 하루와 근황을 몇 문장이나 덧붙여 조금 더 친절하고 소상하게 들려주는 편입니다.

어쨌든 그들이 “하와유”로 통용 되는 질문을 던질 때의 동기는 나라는 인물을 진심으로 궁금해 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것. 특히 후자일 경우 그들을 쌩하게 볼 것이 아니라 단지 이것이 그들의 가장 단편적인 문화일 뿐이라고 생각을 고정시키게 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들이 사심 없이 “하와유”를 할 때마다 내가 영어로 대답해 볼 수 있는 기회는 도처에 널려 있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열심히 잡아 물면 됩니다. 그리고 고민없이 툭툭 말하면 됩니다. 특히 처음 본 사람이 그 질문을 던졌더라도, 당황할 것 없이 적당히 문장을 구사하면 됩니다. 나에 대해서 뭐가 그리 궁금하냐는 경계심만 버리면 모든 일상 회화는 잘 풀립니다.

나와 그들이 필수적으로 말을 주고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용건사항을 넘어 그때그때 주제를 정해가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지만 저는 이런 것이 궁금했습니다. 신기할 것 같았습니다. 외국어로 하는 완성된 문장과 문장의 교환 말고, 하나의 맥락 안에 들어 있게 된다면요. 10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떠들기에 마땅한 주제를 찾는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정착하고도 꽤 오랜 시간이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서면서는 이게 ‘대화’가 아니고 ‘퍼즐 맞추기’와 다를게 없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허다한 외국인들은 내게,

“어디서 왔어?”, “전공이 뭐야?”, “미국엔 이번에 처음 온거야?”, “학교 맘에 들어?” 이 네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질문만을 던졌고, 저는 규격화 된 답변 몇 개를 머릿 속에 가지고 다녔습니다. 필요할 때 꺼내서 맞추고, 다시 해체하고,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다시 가져다 껴 맞추고, 대화는 완성 되지만 남는 건 없고. 그런 과정들이 반복 되었습니다. 다시 돌아와 두 번째 학기가 시작 되면서는, 이런 퍼즐 놀이가 끝난 후에 “Actually..."(실은)을 덧붙이며 그 때부터는 나의 정보 말고 나의 이야기를 들려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외국에서의 생활 하려거든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정착기에 있을 때 만나는 사람들은 나의 가장 기초적인 정보만으로도 대화에 흥미를 느낄 수 있지만 곧 쉽게 빠져나가니까요. 그게 아니라, 그들에게 나를 소개한지 한참이 되었다고 느껴졌을 때 즈음에야 여러 가지 소재들을 꺼내어 대화해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오픈하고 입을 트고의 차이가 아닙니다. 관계를 맺어야 말 같은 말을 하는 건 당연한거니까요,

그래서 전 요즘 “원 아잇쓰 어무에-리카노↗ 12 온스, 위라웃 애니 씨럽↘ 노 엑스트르아 샷↘'이라고 읊고 커피를 테이크 아웃 합니다. 너무 자주 말한 문장은 올바른 한덩어리의 발음과 억양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바나나 앤 캐럿 파운드 케이크’를 같이 주문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잘 하던 커피 주문 문장도 입에서 꼬입니다. 어쩌겠어요. 그래도 나는 결국 맛 좋은 커피를 손에 들고 나옵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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