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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이 소설 자체에서 앞부분을 內(안 내)자를 쓰시고, 

후반부를 外(바깥 외)자를 쓰시고, 

일종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시 바깥이라는 의미에서 再, 外(두번 재, 바깥 외)라는 한자어를 쓰시고 있는데..


황정은- 네. 바깥으로 나왔으나 자기가 여태 겪어 온 세계와 별 다를게 없는 바깥이므로 결국은 안인, 그러니까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화자의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 저는 이게 애초에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쓰고나서 방송을 통해 만난 서천석 박사님께서, 가정 폭력이나 어렸을 때 심한 폭력에 노출되었거나 뭔가 이렇게 내면에 문제가 생긴 아이들이 달라질 수 있는 계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와중에 저는 그 세계의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방법으로 저는 예술을 얘기를 했었어요. 음악이라든가, 예술이라든가, 문학. 만나면 뭔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요? 라고 물었더니 다 필요 없고, 귀인을 만나야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귀인을 만나야 한다. 그게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대요. 말하자면 일종의 조력자인 셈인거죠. 여태까지의 세계와 다른 식의 세계를 재현해주고 심지어 그가 자기가 그 인생의 조력자라는 걸 못 알아챌 수도 있는데 어떤 식의 기회를, 어떤 식의 순간을 재현해줄 수 있는 어떤 사람, 이 사람을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가 자기 세계에 담긴 그 인물이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완전히 결정하는 요소라고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그 얘기를 듣고 제가 띵 했던게, 운이라는 얘기잖아요 그러면. 


이동진- 그렇죠. 우연이라는 얘기죠.


황정은- 만날 수 있고, 만날 수 없고가 완전히 운이라는 문제고.


김중혁- 그런데 그건 반반인게 황정은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예술을 하면 귀인을 알아볼 수 있는 가능성이 넓어질 수는 있죠.


황정은-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덧붙이면, 귀인을 만나는게 완전한 운인데 거기다가 덧붙여서 그런 귀인을 만났을 때 '아 내가 이런 순간을 만났구나. 이 순간으로 내 세계를 달리 상상해야겠다'라는 그런 해석자로서의 어떤 여력, 능력이 그 당사자한테도 이미 있어야 된다는 말인거잖아요. (김중혁 작가님의) 말마따나, 예술을 만난 상태든, 준비가 된 상태여야 그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여기고 방향 전환이 될텐데, 그러면 결국 만나는 것도 운이고, 만난다 하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럼 결국은 소설 말고 실제 현실에서 어떤 폭력적 상황에 담겨서 닫혀버린, 폐쇄적 세계를 가진 인물이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주 극 소수의 경우이지 않을까? 그럼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낙하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계속해서. 네 그런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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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저는 이 이야기 속에서 상당한 폭력이 등장하는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폭력이 사실 그다지 화려하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욕도 그냥 '씨발' 그것만 반복적으로 등장할 뿐이고, 그렇지만 정말 무서운 폭력은 이야기 자체를 통틀어서 어머니가 앨리시어에게 퍼붓는 이야기, 욕 한 마디 등장하지 않는 그 이야기가 저는 아주 끔찍한 폭력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왜냐하면 귀는 어떻게 좀 막는다고 하여 완벽하게 차단되는 것이 아니니까. 들리는 이야기, 그것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이 (그래서) 동생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을 했고. 그런 의미에서 동생이 사라졌다는 건 앨리시어에게는 청자가 사라진거잖아요. 이 이야기로부터 자기가 (이야기를) 하면서도 스스로 보호받는 면이 있었을텐데. 그것도 불가능해진 시점에서 네, 그래서 더 동생의 죽음이 앨리시어에게 미치는 영향이 상당할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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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은하계는 빅뱅 이후에 별들과 별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서 팽창하잖아요. 그 까마득히 멀어지는 그런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자기의 고통쯤은, 나의 괴로운 현실 쯤은 그 사이에서는 한 점 먼지 밖에 아닐 것이다라고 (이 소설은) 처음에는 씁니다. 그런데 이게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지도 않으면서 하는 관조적인 정신주의 같은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그리고나서 바로 그 문장을 부정을 하죠. 뭐라고 쓰나면. 이 부분을 저는 제일 통괘하게 생각하는데요.


한 점 먼지도 되지 않는 앨리시어의 고통 역시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라고 한 다음에


그런 갤럭시는 좆같다. 앨리시어의 고통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될 갤럭시란 앨리시어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문장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사실은 이런 것이 여기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도 사실상 유사한 맥락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아버지가 "모든 생명은 다 존귀한 것이야" 라는 굉장히 멋진 말씀을 하시는데 그러면서 행동도 낚시터에서 물고기를 잡은 다음에 다시 다 풀어줍니다. 몇 마리만 제외하고. 어떻게보면 굉장히 숭고한 것 처럼 보이는데 거기에 대한 앨리시어의 말은 


아니 입을 찢어 놓았으면 먹든가 죽이든가. 입을 찢어 놓고 도로 놓아주면서 가치있는 목숨 운운하는 인간은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통렬하게 속으로 반박을 하죠. 이 두가지가 사실은 같은 맥락이라고 보는데 저는 그런 데서 굉장한 어떤 시원함? 이런 말을 위해서 아 '좆'이라는 말이 생겨났구나! 라고 생각될 정도. 그런 씨발 된 세상에 좆같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굉장히 시원한 부분이 있다는 거죠."


-이동진의 빨간책방 60회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파씨의 입문> 편 중 




야만적인 앨리스씨

저자
#{for:author::2}, 야만적인 앨리스씨#{/for:author}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12-0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황정은의 두번째 장편소설, 여장 노숙인으로부터 올해의 문제작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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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데 정말 천천히 읽혔다. 내 방을, 지하철을 한 순간에 음침한 앨리시어네 고모리로 만들어 버리는 힘은 있지만 작가의 해설을 듣지 않으면 그냥 음침한 기운에서만 그칠 지도 몰랐을 터.

그래서인가. (아직까지는) 소설보다 소설가가 더 좋은 첫번째 사례.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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