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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80일만에 "만나자"고 운을 띄워준 A를 만났다. 쥘 베른은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제목의 책을 썼으니 누구는 세계일주를 하는동안 나는 기다림으로 일관해야했던 참 기나긴 시간이었다. A는 지난 11월 우울증을 진단 받았다. 그리고서는 자신을 위해 치유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며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었다. 나는 평균적으로 십일에 한번씩은 안부를 묻는 연락을 해왔던 것 같다. "잘 지내?"라는 질문에 포함 된 '잘'이라는 단어가 그 친구에게 얼마나 부질없고 가볍게 느껴질까 싶어 한 번도 잘 지내냐고는 말하지 못했다. 살아있냐는 표현을 가장 자주 썼던 것 같고, 답장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었다. 그러다 지난주말, 최근 두 번 정도 자살시도를 했었다는 내용의 문자메세지를 받곤 아무렇지 않은 척 만나면 뭘 먹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가 술만은 마시면 안될 것 같아서 정오에 만나자고 했다. 그렇게 정오에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듣다가 그 동네에서 가장 먼저 영업을 시작하는 곳에 들어가 술잔을 주고 받고, 그러다 내가 먼저 필름이 끊겨버렸고 이전에 서너번 놀러가본 적이 있었던 A의 자취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이 드는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정해진 양만 먹은 것 맞냐는 질문을 하고서 나는 편안하게 잠을 잤고, 새벽 세시에 눈이 떠졌는데 A가 옆에서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을 자고 있었다.

긴 하루였다. A는 또 하루를 이렇게 살아내주었다.
지난 80여일동안 A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어떤 생각들이 들었는지, 스스로를 바라볼 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이고 또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인지,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나는 너가 신인 시나리오 작가고, 내가 베테랑 감독인데 작가가 들고 온 시나리오라는게 너무 무겁고 너무 개연성 없는 사건들 뿐이라 어떤 관객도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시나리오를 듣고 있는 것 같다고. 그니까 내가 지금 이 시나리오를 듣고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는거야. 이 이야기가 사람들한테 먹힐까, 를 생각해보면 별로 낙관적이지가 않은거야. 근데 이게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고 진짜 네 이야기란 말이네, 그게 제일 어이없고, 또 어렵고 머리 아프네. 하는 말을 했다.

A의 자취방에서 뒹굴거리다가, 내가 필름이 끊기니 정말 온갖 모습들을 보여주었는데 그덕에 간만에 많이 웃었다는 부끄러운 이야기까지 또 듣고서 해장은 집에서 하겠다며 오전 열시쯤 나오는 길에, 다음 만남이 또 기약되어 있지 않음을 알면서 걷는 중에, 여전히 해줄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는 사이를 왜 지속하고 싶은건지 생각해보았다. 답은 없다. 아마 다른게 아니라 답이 없는 것을 한 켠에 끌어안고 사는 게, 그런 게 사는 건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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