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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쓰기

= 쥐씨 2015.08.25 13:42

'죽을 맛이다'라는 말은 유용한 말이다. 영어에도 "The longest hour of my life"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길게든, 깊게든 죽을 맛을 경험하는 것이 지구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이의 삶의 기초 양식이라는 점을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 말을 듣는 입장에 있게 될 때마다 '네가 어느 정도로 죽을 맛이길래 그래, 나보다?' 라든가 '아아, 내가 저 사람이라면 정말 정말 죽을 맛이겠다. 저 사람이 살아남아 있는건 기적이야.' 등의 은밀한 저울질을 한다. 죽을 맛의 정도라는 건 이를테면, '동대문 엽기 떡볶이'의 떡볶이 매운 맛의 강도처럼, 1단계가 누군가에게는 너무 맵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2단계를 향한 도전 의식을 거뜬히 불러일으키고, 단골 고객이 되게끔 하는 그런 주관적인 것이 아닐까? 그러나 얼굴을 마주한 상대에게 이 말을 꺼내는 그 누구도 '죽음의 무경험자'임에는 예외가 없다는 사실이 누구든 "죽을 맛이다"를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달리 보면 우리는 늘 "죽을 맛이다"라는 옳은 말을 반복하며 살고 있는데, 그보다는 "죽어가는 맛이다"가 보다 더 정확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죽어가는 맛을 보며 살고 있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 중 힘 없고, 빽도 없는, 지금은 아무 모양 없어서 무슨 모양이 될 지 알 수가 없는 그런 부류의 것들이 어느새 단단한 골격의 일부분이 되어 있음을 볼 때가 있다. 한편으로는 그 구성요소들 중 스스로 믿어왔고, 안도했던 부분들을 분리수거함으로 보내야 할 때가 있다. 우리 집 단지 내에 매 주 수요일 분리수거 차가 오듯, 나도 일주일 중 하루를 정해 그간 나로부터 스러지고, 뭉개져서 결국엔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것들을 모아 멀리 던져 버린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삶의 활동들, 이러다가 곧 저러는 것, 좋았던 것을 더 이상 볼 자신이 없어지고, 싫었던 것이 다시 보고싶어지는 것은 결국 죽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에 "죽을 맛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오늘도 나는 당신과 내가 죽을 맛이기를 바란다.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지고,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엉켜있는가와는 상관이 없다. 그것이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들 중 아무도 아직 죽지 않았다. 나는 당신에게 위로가 필요 없는 인삿말을 건낸다. "정말 죽을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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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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