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어릴 적 흥얼거렸던 노래에 따르면 동대문은 열두시가 되면() 문이 닫혔다. 하지만 2016년에 열린 게이트는 닫힐 줄 몰랐고 그 문턱으로는 연일 이어지는 뉴스라는 이름의 기나긴 꼬리가 지나다녔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아 예전만큼 영화를 보는 일에서 재미를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100만개의 촛불은 영화 속 100만명의 엑스트라가 들고 있는 소품이 아니었다. 지난 한 해 우리는 답답했고 그 어느 때보다 답을 찾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만난 몇 권의 책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곳을 겨우 희망하는 바람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이 책은 한국에서 30대 여성으로서 표준의 삶을 꾸려가는 김지영씨의 이야기이다. 정말 이렇게나 간단하게 요약되는 소설을 왜 읽어야 할까? 당신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녀의 일상은 출산과 양육, 그리고 일과 가정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고민 등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범위 바깥, 당신이 간과해버릴 수 있는 그녀의 일상도 있다. 그 나머지는 늘 새롭고, 늘 외로운 시간이다. 그래서 김지영씨는 누군가의 딸, 누나, 여자친구, 며느리로서 낱낱이 그려진 한 여자의 삶이 아름답거나 위대한 것으로 적당히 포장 되는게 싫다.

82년생 김지영의 시작과 끝은 그녀가 하루아침에 이상 징후를 보이면서 의사를 찾아가게 되는 시간대인 2015년 가을, 2016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독자는 이제 더 이상 주변의 또 다른 김지영씨와 연대하는 일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을 처음에는 알지 못하다가, 마지막장이 되어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건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들은,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132)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그런데 82년생 김지영씨가 이 책을 읽었다면 조금 덜 지쳤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갈수록 사회 성원들이 성차별에 대한 기초적인 수준은 벗어나 조금씩 성숙한 지점으로 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2016년은 그러한 짐작이 산산조각난 해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의 저자는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고, 한달만에 첫 번째 책을 집필하였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여성들이여 스스로를 지키자가 절대 아니며, 바로 이상한 말에는 제대로 된 말로 받아치자이다.

이 책에서는 당신에게는 대답할 의무가 없다챕터를 눈여겨볼만하다. 우리는 대화의 주체에게 잘 준비 된 말만큼이나 대답하지 않을 자유도 소중하다는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던 것일까. 성차별 토픽 일상회화 실전대응 매뉴얼은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형태의 책이었으므로 필자는 호기심을 담아 지난 여름 텀블벅을 통해 이 책의 초판을 후원했다. 그리고는 출간 두 달만에 1만부가 판매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리에겐 이런 베스트셀러가 필요하다.

 

어른 없는 사회, 우치다 타츠루

고령화 사회에 노인은 많지만 어른은 없다. 생물학적 나이는 어른의 척도가 될 수 없는 탓이다. 어른 없는 사회는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가 문자 그대로 어른을 찾아보기 힘든 일본 사회에 대해 진단한 에세이다. 저자는 현재의 사회를 완전히 탈바꿈하거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어진 것들로 우리 주변을 한땀 한땀 수선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스승을 통한 배움, 약자를 위해 운영되는 시스템, 향상 된 의사소통능력 등 가장 상식적인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쉽게 적어냈다.

오늘날 상식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모두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일은 아니라고 여기는 어린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 특히 사회 시스템을 꼭대기에서 핸들링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어린아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6) 일본 사회를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게 들린다. 저자가 했던 말이 바로 다음 단락에서 거의 동일한 표현으로 반복되는 것을 여러번 볼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유일한 아쉬운 점이다. 이는 중요한 말을 쉽게 지나쳐버리지 말라는 저자의 깊은 배려일까.

 

침묵의 책, 세라 메이틀런드

이러나 저러나, 2016년만큼 뉴스의 헤드라인, SNS 타임라인과 살을 맞대고 있었던 해는 이제까지 없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들 속에서 살았다. 그러던 사이 감쪽같이 침묵의 미덕을 잊었다. 세라 메이틀런드는 침묵을 배우고, 좋아하고, 그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녀가 높은집이라 부른 웨어데일의 산등성이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시작해 스카이 섬, 시나이 사막, 갤러웨이의 산으로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침묵의 책은 소란하고 잡음이 많은 당신의 일상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법 같은 마법의 주문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그 대신 침묵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것이 2017년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아닐까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