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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에 의해 많은 것을 발명하는 현대인은 피톤치드 스프레이를 만들었다. 그것을 뿌리면 부지런히 우리를 괴롭히는 미세먼지나, 새집증후군을 제거하는데에 도움이 되는 덕이다. 산으로, 숲으로 가서 한껏 피톤치드를 들이마시는 것이 더 좋은 일이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풀내음 나는 책을 골라 읽기를 권한다.

 

랩 걸, 호프 자런 (2017, 알마)

뿌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기껏해야 거울을 보며 아 뿌염을 해야할 때가 되었구나하고 알아차릴 때 뿐이었다. 그러나 본래 뿌리라는 건 보다 더 위엄이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던가. 여기, 나무의 뿌리부터 열매까지 연구하는 과학자 호프 자런의 자서전 랩 걸이 있다. 이 책의 본문은 아리따 글꼴로 인쇄되었는데 뿌리와 이파리’, ‘나무와 옹이’, ‘꽃과 열매같은 단어들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서체는 아마 없을 것이다.

호프 자런은 학부 시절 문학을 전공했다가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는 과학 실험실에서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과학으로 전과하였다. 그녀는 문·이과 통합적 사고를 가진, 균형잡힌 이야기꾼이다. “체리 씨앗은 아무 문제 없이 100년을 기다리기도 한다.”(50), “낙엽수의 삶은 연간 예산의 지배를 받는다.”(173),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203)와 같은 문장들에서 시작해 식물의 생애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간다.

랩 걸에서 인상적인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학부시절 병원 약국에서 수액 주머니와 (마취제의 또 다른 이름인) 기절 주머니 등을 만드는 알바를 할 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까다로운 업무를 하면서, 그녀는 학기말 논문 주제인 찰스 디킨스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 속 구절들을 열 번도 넘게 인용하여 알바일지를 적는다. 과연 될성부른 작가의 떡잎이 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는 순간이다. 다른 하나는, 출산할 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이를 낳는 과정을 감정을 최소화하고 과학자의 시각으로 객관적이고, 꼼꼼하게 기록한다.

팽나무에 관한 연구를 하던 중 그 해 실험구역 반경 내의 어떤 팽나무도 꽃이나 열매를 맺지 않았을 때, 저자는 책을 통틀어 유일하게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표현한다. 피조세계는 인간이 어림잡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이유를 알 수 없이 벌어지는 일들로 가득찬 곳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2002, 동아일보사)

랩 걸이 나무에 질문을 건내는 책이라면, 나를 부르는 숲은 숲에 딴지를 거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국 동부의 어느 작은 마을로 이사를 온 빌 브라이슨은 우연히 마을 끝에서 숲으로 사라져 가는 길을 발견”(13)하는데, 그 길은 미국 동부에 3,360km을 가로지르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일부였다. 책을 채 두 장을 넘기지도 않았을 때부터, 우리는 그가 트레일로 종주를 떠날 구실을 찾기 위해 애 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숲에서는 야생곰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고, 그 숲은 더 멀리서 보면 결국 미국에 있기 때문에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피살 될 가능성도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여러 가지 사전 자료를 검토해보면서 이 모험이 안전성을 보장하는지 거듭 확인하면서도 결국 특별한 구실을 찾지 못한 빌 브라이슨은 떠나기를 결심한다.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함께 떠날 동료를 구인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수단이 간절히 사정하는 문구를 넣어 무작위로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라는 것이다. 카드를 읽고서 유일하게 함께 가도 되느냐고 묻는 카츠 역시 왜 떠나고자 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나를 부르는 숲은 이 두 사람이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여러모로 딴지를 걸며 하루하루 걸어나가는 기록이다. 카츠는 이고 가는 짐이 무거워서 식량을 포함한 짐의 일부를 무려 두 번이나 브라이슨과의 상의도 없이 절벽에 내던진다. 브라이슨은 잘 만들어지지 않은 지도를 보며 우거진 숲에서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이렇게 나쁜 지도를 가지고 산에 들어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270)는 것이 저자의 진심이다.

트레일의 모든 영역을 빼놓지 않고 종주하는 사람을 스루 하이커라고 하는데 이들은 결국 스루 하이커가 같은 존재가 되기를 상호합의 하에 포기한다. 중간에 종주를 몇 달 쉬기도 하고, 어떤 구간은 걷는 대신 차로 이동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함께 주어진 숲의 길들을 헤쳐나갔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주어진 길을 순례자처럼 감내하고 꾹꾹 걷는 이들도 있지만, 서로의 표정을 살피며 자신들만의 동선을 만들어나가는 브라이슨과 카츠 같은 이들도 있다. 당신은 이 계절을 어떻게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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